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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보수·진보보다 넓고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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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보수·진보보다 넓고 큽니다”
  • 정윤석
  • 승인 2016.06.14 0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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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성경을 시대의 언어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러 - 이동원 목사
▲ 한국이 낳은 세계적 강해설교가 이동원 목사(사진 Look&Link 김한수 PD)

영어를 배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이동원 목사(70, 지구촌교회 원로, GMN 대표)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 그 자신도 몰랐다.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재수하던 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선교사들과 접촉했다. 그 과정에서 김장환 목사를 만났다. ‘종교는 착하게 사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목사에게 당시 기독교는 ‘착함’을 추구하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로마서를 공부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로 넘어갔다. 착하게 살아야 구원받는 건 줄 알았는데 사람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다는 메시지에 눈을 뜨게 됐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고, 사람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시고 그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종교관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64년의 일이었다.

이 복음에 눈을 뜬 이 목사에게 연이어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격이 몰려왔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법대를 진학하려다가 신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김장환 목사와 상담을 한 후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윌리엄 틴데일 대학(William Tyndale College)에서 성서 신학을 전공하게 됐다. 그 후 이 목사는 2010년 12월 26일 은퇴하기까지 미국에서의 이민목회, 한국에서의 개척목회 등 다양한 목회 경험을 하게 된다. 그에게 목회란 무엇일까? 이 목사와의 인터뷰는 2016년 5월 25일 경기도 미금역 인근에 위치한 GMN(Global Ministry Network) 사무실에서 1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기자가 목회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 목사는 목회의 정의에 대해 답하기보다 ‘목자’라는 단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목자셨다. 선한 목자셨다. 목사는 그분의 사역을 본받는 작은 목자여야 한다는 게 이 목사의 생각이다. 예수의 사역은 복음 선포(preaching), 가르침(teaching), 고치심(healing), 이 세가지 단어로 요약된다며, 이 목사는 목회의 핵심은 이 세 가지라고 강조한다. 복음을 전하고 그것에 응답한 사람을 제자로 잘 양육하고, 그리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건강하게 하는 게 목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목사는 이 핵심을 갖고 5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역해왔다. 그는 묘비명에 어떤 글을 남기고 싶은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치열하게 씨름했던 사람'으로 기록되길 바란다"고 주저없이 말했다. 그는 “제 생애가 그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치열한 세월을 살았다”며 “제겐 그거보다 중요한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

후배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도 이 목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고 강조했다. 결국 목회자는 성경을 통해 목회의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설교는 깊은 사색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고전과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말 것을 주문했다. 고전과 인문학이 생각을 깊게 하고 확장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 목사가 인터넷을 통해 가장 관심있게 보는 건 ‘뉴스’였다. 이 목사는 인터넷 뉴스는 다 본다고 한다. newspaper.co.kr란 사이트를 이용해서다. 이곳에 신문이 한꺼번에 다 나온다. 기본적으로는 주요 헤드라인 뉴스를 본다. 뉴스를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걸 알아야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할 수 있어서다. 그리고 목회자의 메시지가 시대를 향해서,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조선일보도 보고 한겨레도 본다.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서다. 이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는 보수·진보보다도 높고 넓다”며 “기독교가 어느 한편, 보수적 견해나, 진보적 견해에 고착돼 있는 건 불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강 씨가 맨부커 상(노벨문학상, 프랑스의 콩쿠르 문학상과 함께 영국에서 제정한 세계 3대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이슈가 됐다. 그와 동시에 소설가만큼이나 관심을 끌었던 게 번역자였다. 한강 씨 소설을 읽고 이해하고 타국어로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면 한 작가가 세계적 권위의 맨부커 상을 수상하는 일은 요원했을 것이다. 이 목사는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도 번역이 안됐다면 도저히 그 책이 알려질 수도 읽혀질 수도 없었는데, 다행히 좋은 번역자가 나와 소개됐다”며 “성경도 우리 시대의 언어로 쉽고 재미있게 읽히도록 번역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이 목사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대단히 훌륭한 기여를 한 것이라고 평했다. 이어 한국에도 제2, 제3의 유진피터슨이 나와서 성경에 한국인의 살가운 정서를 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진재혁 목사에게 목회자 가운을 입혀주고 단추를 채워주는 이동원 목사(2010년 12월 26일)

한국교회의 분쟁은 원로와 후임 목회자간의 갈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목사는 후임 진재혁 목사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는 “후임 목회자가 물어보는 것 이외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며 “리더십의 바통을 넘겨 줬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책임이고, 그분이 책임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 내가 교회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어보고 상의하고자 하는 것 외에는 후임 목회자의 목회에 불개입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목사는 후임 목회자의 목회에 개입하고 간섭하면 참견이 돼서 틀림없이 갈등이 생기게 된다고 지적한다.

목회자들의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극복할 좋은 방법이란 게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성도들도 모두 약한 인간이고, 목회자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목회자는 여성들과 접촉이 쉽고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목회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목사는 환경 자체를 성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부부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뿐 아니라 여신도들과 사사로운 관계나 1:1로 접촉하는 기회 자체를 만들지 말고 차단하라는 것이었다. 이 목사는 아내 이외의 여자를 차에 태우지 말아야 한다며 사람은 언제나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기회 자체를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 현실이 어둡다”면서도 “그러나 아직도 바르게 하려고 몸부림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으니 한국교회의 희망을 접지 않아야 하고 평신도들이 목회자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후배 목회자들도 한국교회 현실이 어렵고 고단하지만 미래에 또한번의 부흥의 시대가 올 수 있으니 그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이 목사는 동녘 동(東)자에 으뜸 원(元)자를 쓴다. 으뜸 원은 그가 맏아들로 1945년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의 부친은 수의사였고 목장의 지배인이었다. 목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에 어렸을 때부터의 별명이 목동이었다. 이동원 목사는 ‘호’를 ‘목동’으로 쓰고 있다. 그는 성경의 언어를 이 시대의 양들에게 전달하는 탁월한 목동, 스토리 텔러다.

다음은 이동원 목사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사진 Look&Link 김한수 PD.

▲ 이동원 목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정윤석 기자(사진 Look&Link 김한수 PD)

목사님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퇴한 이후 어떻게 지내시나요?
은퇴한 이후에 더 바빠졌어요. 전에는 교회 중심으로 모든 스케줄이 짜여 있었죠. 지금은 온갖 곳, 동서남북을 다녀요. 더 바빠졌어요.

주로 어디서 초청을 하나요?
그게 아주 다양해요. 개교회 부흥회, 목회자 세미나, 기독교 컨퍼런스 등 다양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도 꼭 지키는 게 있어요. 한달에 한번은 꼭 가평의 필그림 하우스에 들어가요. 은퇴 이후의 주 사역지로 만든 곳이기에 한달에 한번 꼭 그곳에서 3박 4일, 4박 5일 세미나를 해요. 한주간은 제가 꼭 들어가요.

목회자 세미나에선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시나요?
요청하는대로 하지만, 제일 많이 하는 건, 설교·리더십 세미나예요. 한국교회 이슈와 관련해서도 세미나를 해요.

목사님 목회하시며 이민목회, 개척목회 등 다양한 경험을 해 보신 거 같아요. 목사님, 목회란 뭔가요?
목회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있어요. ‘목자’라는 단어예요. 예수님이 목자이시니까요. 선한 목자, 위대한 목자, 큰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어요.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가 섬기도록 부름 받은 작은 목자들이란 의미예요. 예수님이 불러서 위임하신 사역, 기본적으로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께서 하신 일이 복음을 선포하시고, 복음을 들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셨어요. 이 세 가지 단어가 중심이거든요. 저는 목회의 핵심이 이 세가지라고 생각해요. 복음을 전하고 그것에 응답한 사람을 제자로 잘 양육하고, 그리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건강하게 하는 게 목회의 핵심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합니다. 50년 가까이 사역하시면서 목회적 상황, 많은 변화가 있었을 거 같습니다.
목회를 시작할 무렵, 정확하게 말하면 60년대 말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교회 부흥의 시대였지요. 사람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전도 안 해도 스스로 교회를 찾아왔어요. 얼마나 기도를 사모했는지, 각 교회마다, 지금처럼 한두시간하고 끝내는 기도회가 아니라, 철야기도회를 하며 온 밤을 세우고, 이런 부흥의 시대였어요. 그런데 저는 사람들이 목말라하고 찾아오는, 그런 부흥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해요. 철저한 세속화의 시대예요. 또 우리가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자체가 잘못한 부분도 많지만 교회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존경하고 사모하고 기대하는 대상이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됐잖아요. 그렇다고 복음 전파의 사역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복음의 소명을 감당해야 하는 참 어려운 시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렇듯 부흥의 시대에서 세속화의 시대로 옮겨간 것이 가장 극명한 차이라고 볼 수 있겠죠.

목사님 목회할 때보다 지금 개척한 목회자, 다음 세대 목회자들은 더 어려운 시대를 맞겠군요.
훨씬 힘들죠. 훨씬 힘들고, 개척도 힘들고. 과거엔 깃발만 꽂으면 사람들이 모인다, 건물만 지으면, 공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모인다는 말이 있었어요. 이젠 아무리 깃발을 꽂고 공간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 그런 시대를 맞이하고 있어요. 개척이 정말 힘들고, 다음 세대 목회자들은 훨씬 더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목회를 계획하고 꿈꾸는 분들에게는 부담이 되는 말씀이네요. 그만큼 준비가 돼야 할 거 같습니다. 목사님 책을 검색하면 많은 책들이 검색됩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있나요?
주로 설교지요. 120권 정도밖에 안돼요. 나머지는 공저가 많구요. 어느 책에 애착이 가느냐는 질문에는 답변이 힘든데, 마치 자식이 10명인데, 어떤 자녀에 애착이 가느냐는 질문과 비슷해요. 그러나 새로 나온 책(이동원 목사의 최신간에는 ‘내 영혼의 거룩한 선택’(두란노)이 있다)이 애착이 가긴 해요. 부모님들이 막내 좋아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나의 존재의 산물이니까. 한결같이 나에겐 소중해요.

목사님은 어떤 목회자로 기억되고 싶은지 궁금합니다(묘비명에는 어떤 글을 남기고 싶으세요?)
(깊은 숨을 쉬며)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치열하게 씨름했던 사람이라고 남기고 싶어요. 제 생애가 그것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치열한 세월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제겐 그거보다 중요한 게 없었어요. 정치도 일절 해본 적이 없지요.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렸던 목사님들이 계시죠. 옥한흠·하용조 목사님 생각나실 때가 있으실 거 같은데, 언제 생각이 많이 나시나요?
요즘 한국교회가 참 어려운데, 한국교회의 어려운 이슈에 대해서 혼자 얘기해도 공허한 메아리예요. 이럴 때 옥목사님이 옆에 계시면 좋겠다 생각할 때가 많아요. 또 새로운 중요한 사역에 대한 제의가 들어올 때가 있어요. 그에 관해선 하용조 목사님이 창의적 아이디어가 많았던 사람이에요. 그럴 때마다 생각이 많이 나요.

홍정길 목사님과는 자주 만나세요?
한달에 한번 이상 자주 만나요.

주로 무슨 얘기를 나누시나요?
사역 때문에 만나니까. 개인적으로 서로 늙어가니까, 격려도 하고 그래요.

▲ 이동원 목사 서재에 놓인 십자가(사진 Look&Link 김한수 PD)

목사님, 지금 신학생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 경험하고 싶은 일은 뭔가요?
저는 후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기본'이다고 말해요. Back to the Basic이죠. 그래서 우리 시절은 공부만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일하면서 공부하는 동기들도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공부에 열중하지 못했던 면이 많았지요. 특별히 저는 신학생 때 원어에 대한 공부를 철저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어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말이에요. 이런 공부들, 원전에 대한 연구를 해야 했는데, 저의 경우 그 부분이 제일 아쉬워요.

그래서 신학생들이 그런 부분을 더 열심히 하면, 기초가 견고한 사역을 더 열심히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고전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날 때, 기독교 고전과 세계 인문학의 고전을 같이 읽는 게 필요해요.

결국 우리가 설교 준비를 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거예요. 고전은 생각을 깊게 하고 확장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줘요. 저는 젊었을 때 도스트 예프스키를 열심히 읽었어요. 그분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런데 요즘 신학생들은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하는 거 같아서 안쓰러워요. 제가 신학할 때는 읽고 싶어도 못 읽었던 책들이 지금 많이 나오거든요. 지금은 교부 시대의 저작들도 막 번역돼서 나오거든요. 그 문헌들도 많이 읽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목회 현장에선 목회자 수요·공급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수급이 안 맞는 거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반드시 중국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중국이 열리고, 지금은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선교를 하는데, 완전히 합법적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선교를 하는 시대가 열릴 거예요. 북한도 열릴 거예요. 열리면 현재 목회자·신학생 수요는 오히려 부족해요. 그러니까 때를 기다리는 게 필요해요. 그동안 임시로, 저는 신학생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당장 목회할 길이 열리지 않으면, 다른 직업도 병행했으면 좋겠어요. Bi Vocation! 이중직이라고 하지요. 저는 성경적으로 이중직이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우선 바울이 천막을 기우면서 선교하고 전도도 했으니까요. 우리도 다른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주말 사역의 개념으로 할 수 있는 준비를 한다면, 교회가 없다, 들어갈 곳이 없다 이렇게 비관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 이동원 목사의 GMN 사무실 서재에 놓인 책자들(사진 Look&Link 김한수 PD)

인터넷 하시면서 가장 관심있게 보는 게 있나요? 궁금해 하는 목회 트렌드가 있나요?
저는 인터넷 뉴스는 다 봐요. 이용하는 사이트는 www.newspaper.co.kr인데, 여기에 보면 신문이 한꺼번에 다 나오니까. 주요 헤드라인 뉴스는 다 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기도도 하고, 내가 준비하는 메시지가 우리 시대를 향해서,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설교와 관련된 자료를 찾기 위해서 인터넷을 봐요. 그 외에는 잘 이용 안하는 편이에요.

조선일보도 보시고 한겨레도 보시겠네요?
네 저는 양쪽을 다 봐요. 똑같이 봅니다. 그래야 균형잡힌 견해가 생긴다고 믿어요. 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보수·진보보다도 높고 넓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독교가 어느 한편, 보수적 견해나, 진보적 견해에 고착돼 있는 건 불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보다 더 높이가 있어야 해요.

목사님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설교자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목사님, 설교란 뭔가요?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심정으로 전해야 하는 건가요?
존스토트가 한 말입니다. 설교란 것은 결국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이라 했어요. 2천년, 3천년 전에 기록되고 선포된 메시지를 오늘의 상황 속에 재해석해서, 오늘의 청중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느냐, 그것이 설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한강 씨가 멘부커 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이슈가 됐습니다. 그만큼 중요했던 게 번역자였는데요. 3천년 전에 기록한 성경의 메시지를 오늘날 청중의 마음을 울리는 언어로 표현하는 거는 참 힘든 일입니다. 설교도 그렇지만 성경 번역도 그런 차원에서 역동적 번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이죠. 그래서 뭐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그게 틀렸다 비판하는데, 저는 우리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공헌을 많이 한 분이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그거 갖고도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분이 대단히 훌륭한 일을 한 거거든요. 그게. 우리 시대의 언어로 성경을 재밌게 접근해서 읽도록 만들어 준 게, 굉장한 큰 기여예요. 우리 한국 사람도, 한국인 유진 피터슨이 나와야 해요. 한국인의 살가운 정감으로, 읽을 수 있는 번역된 성경이 나와야죠.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도 번역이 안돼 있으면 도저히 그 책이 알려질 수도 읽혀질 수도 없었는데, 다행히 좋은 번역자가 나와 소개했잖아요. 유일한 번역 하나만 인정하다가 잘못나간 사람들이 킹제임스 번역본 옹호자들이에요. 정신나간 사람들이에요. 그 시대에는 킹제임스 번역이 필요했지만 우리 시대에 또, 번역이 필요해요. 끊임없이 성경은 번역돼야 해요. 새로운 시대마다 번역돼서 전달돼야 한다고 생각돼요.

목사님 한국 교회 분쟁 요인 중 하나는 원로와 후임 관계에서 많이 옵니다. 후임 진재혁 목사님과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진 목사님은 취임 6개월 전에 지구촌교회로 왔어요. 그리고 3년 동안 제가 정기적으로 만나서 멘토링을 했지요. 취임하고도 3년간은 그렇게 했어요. 그 이후에는 본인이 나에게 물어보는 것 이외에는 일체 관여를 하지 않아요. 이제는 리더십의 바통을 넘겨 줬어요.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책임이고, 그분이 책임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해요. 저는 의논의 대상이고, 카운슬링의 대상이지 내가 교회를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진 목사가 요청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협력하고 도와 주고, 동역해요. 그러나 내 편에서 지시하는 건 일체 없습니다.

▲ 이동원 목사와 우명자 사모(사진 Look&Link 김한수 PD)

그게 후임자랑 원활하게 관계유지를 하는 좋은 방법 같습니다(웃음).
개입하고 간섭하다보면 참견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틀림없이 갈등이 생기지요.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개혁 과제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싶습니까?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교회와 관련한 모든 조직, 기관의 직분은 섬김의 직분이지요. 그게 무슨 계급이 아니예요. 그런데 그걸 계급으로 오해하고 그 자리에서 사사로운 이권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게 없어져야 해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져야 해요. 그래서 아직도 총회장 나오는 데 돈 쓰고, 그게 다 봉사하고 섬기는 직분인데, 왜 그렇게 하는 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각 교회에서도 직분자를 세울 때, 돈 걷고 이런 거 일체 하지 말아야지요. 우리는 직분자 세울 때 1원도 걷지 않아요. 교회가 오히려 축하 파티를 간략하게 해주고 끝내지요.

인터넷에선 한국교회를 ‘개독교’라고 부릅니다. 이 현실을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까요?
저는 이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업자득이고, 우리가 잘못해서 얻은 별명이니까요. 그걸 부인하지 말고, 세상과 자꾸 싸우려 하지 말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우리를 개혁하는 기회로 삼고 고쳐 나가면 자연스레 없어질 거예요. 그걸 자꾸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니까, 오히려 자기를 자꾸 포장하게 되거든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나는 목회하면서 내가 잘못하면 항상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하고 인정해요. 그러면 거기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거를 감추고 포장하니까 그거를 더 뒤지고 캐내는 거예요.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완전하지 못하니까, 실수할 수 있고, 실수 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해요. 실수를 통해서 성장·성숙하거든요. ‘그거는 내가 판단을 잘못한 거 같다. 미안하다!’ 이런 말 하세요. 저는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문제될 게 더 없어요.

목회자들의 성적인 문제가 도마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는 날까지 목회자, 아니 성도들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일 거라고 보는데요.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지.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거기에는 좋은 방법이란 게 있을 수 없어요. 우리가 다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요. 목회자도 인간이기 때문에요. 그런데 목회자들은 더 특별히 여성들과 접촉하는게 쉬워요. 여성들에 둘러싸여 목회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목회자는 가장 먼저 부부 관계가 좋아야 해요. 정말 좋아야 하고, 교인들과 너무 사사로운 관계나 대화를 하지 않도록 환경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어 비서와 목사가 단 둘이 있다든가, 보시면 알겠지만 저희 사무실(이동원 목사가 대표로 있는 GMN 사무실을 일컬음)에는 직원들과 다 같이 있어요. 1:1의 접촉 기회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해요.

저는 목회하면서 차에 아내 이외의 여자를 태우지 않았어요.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해요. 환경적으로 그런 기회 자체를 만들지 않아야 해요. 사람은 언제나 넘어질 수 있으니까요. 언제든지 그럴 수 있으니까요.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거예요. 불미스런 일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해요. 그러나 실수 한 사람에 대해서는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람을 매장시키지만 말고요.

목사님의 성함의 뜻은 뭔가요?
동녘 동(東)자에 으뜸 원(元)자를 써요. 제가 동생이 6명이에요. 제가 맏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으뜸 원자를 썼어요.

어린 시절 목회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일은 뭔가요?
우리 부모님은 믿지 않던 분이에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가 수의사셨지요. 그리고 목장의 지배인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목장에서 태어났죠(이 목사는 1945년 생이다). 어렸을 때 별명이 목동이었어요.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목동을 하다가 목사가 된 거죠(웃음). 그래서 지금 ‘호’를 ‘목동’으로 쓰고 있어요.

시편 23편이 남다르게 느껴지시겠어요.
그럼요. 그래서 책도 썼어요.

목회자가 되겠다고 어떻게 결심하게 되셨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시 1차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재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재수하는 기간에 영어를 배우려고, 선교사들을 만났지요. 교회를 안 다닐 때였어요. 영어를 배우려고 선교사님들을 찾아다니다가 교회를 다니게 됐어요.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요. 예수 믿으려고 했던 거는 아니구요. 그때 김장환 목사님하고 같이 일하는 선교사님들이 몇 분 계셨어요. 그분들과 영어 바이블 스터디 클래스가 있었죠. 거기를 다니며 로마서를 공부하고 갈라디아서 공부를 했어요.

나는 종교라는 건 다 착한 사람이 되라는 건 줄 알았죠. 그런데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된 거예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다, 내가 나를 의롭다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종교관과 전혀 다른 거였어요. 그때 ‘복음’이란 정말 독특한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후 구원에 대한 감격과 확신이 들어왔어요. 1964년의 일이었어요. 그러다가 이 복음을 너무 말하고 싶고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내가 신학을 더 공부해서 전하자’라는 생각을 해서 결국 법대를 가려고 하다가 신학으로 전환을 하게 된 거예요. 김장환 목사님과 의논한 후 미국으로 가게 된 거예요.

▲ 이동원 목사(사진 Look&Link 김한수 PD)

목사가 된 후 후회한 적은 없나요? 가장 힘들었던 때는요?
후회한 적은 없어요. 후회보다, 아픔이 있죠. 제가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하다가 우리 아이들이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족들을 미국에 두고 혼자 한국에 와서 개척을 했어요. 그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서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가장 틴에이저 시절에 가장 부모가 필요할 때, 제가 자리를 비켜 있었으니까, 그게 아이들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에요. 그때 아이들 옆에 있어주고, 시간을 줬어야 하는데, 그러면 아이들도 힘들지 않았을 텐데, 이런 아픔이죠.

자녀들도 아쉬워하나요?
그렇죠.

어떤 목회자와 기자회견을 할 때였어요. 가족 관계를 잘 말씀 안하셔서 여쭤봤더니, 당신 스스로 ‘가정사역은 실패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랬어요. 저는 그나마 나았어요. 저보다 연배가 드신 분들은 더했죠. 제가 그런 아픔들을 보면서 한국에 와서 1975년 처음 시작한 것이 ‘새생활 세미나’였어요. 그게 한국 최초의 가정 세미나였어요. 교본을 만들었어요. 그때는 가정 사역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최초의 세미나였죠. 바인더도 만들고. 처음엔 교회에서 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그래서 유관순 기념관을 빌려서 5년을 했지요. 유명한 세미나였습니다. 제가 가정 생활을 잘 해서라기 보다, 가정의 필요와 아픔과 고통을 느끼면서 누군가가 시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시작한 후 전문가들이 많이 생겼지요. 그래서 저는 그걸 내려 놓고 목회로 돌아간 거예요. 지금은 가정 사역을 참 많이 하죠.

사모님과 가족들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우리 집사람은 화가예요. 그런데 저의 목회 뒷바라지 하느라고 전혀 그림을 못 그렸지요. 은퇴 후 요즘 열심히 그림을 그려요. 큰 아이는 신학을 하고 미국에서 번역 활동을 하고 있어요. 제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둘째는 역시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구요. 큰 아이는 이황 목사예요. 둘째는 이범 변호사예요.

이황 선생을 존경해서 큰 아이의 이름을 지으신 건가요?
저희가 그 집안이라서 이름을 지었지요. 본래는 16대 손이 돼야 하는데 어떻게 계산하면 22대가 된다고 해요.

목회와 가정의 두 측면에서 가정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양자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저는 저희 스테프들에게도 빨리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해요. 별도의 시간을, 너무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역이란 이름으로 희생하지 말라고 해요. 제가 많이 강조해요.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가정에 대한 책임을 다 하면서 사역을 하라고 하죠. 반대로 가정을 핑계로 사역을 등한히 하면 안되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자기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하셨으니까요. 가정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요.

목사님,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취미나 즐겨하시는 음식이 있나요?
운동은, 아무것도 없어요. 숨쉬기 운동! 방안에서 운동해요. 노완우 목사님이 가르쳐주신 목침·경침 운동해요. 그리고 걸어요. 집근처에서 산책하지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한말씀 부탁하겠습니다.
한국교회 현실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희망을 접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평신도들이 목회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했을 거예요. 그러나 아직도 바르게 하려고 몸부림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목회자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후배 목회자들도 한국교회 현실이 어렵고 고단하지만 미래의 또한번의 부흥의 시대가 올 수 있으니 그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목사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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