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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와 이단(Dispensationalism and the C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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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와 이단(Dispensationalism and the Cults)
  • 정동섭 목사
  • 승인 2015.02.1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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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가족관계연구소장: 전 침신대 교수;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Ph.D.)

▲ 정동섭 목사

1. 세대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이다. Darby의 지도하에 형제교회는 급성장했는데, 세대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에 유입되면서 가시적인 기성교회의 제도와 충돌하였다.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편협한 노선을 주창하면서, 뉴톤(B.W. Newton)과 심한 논쟁 끝에 달비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영미에는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형제교회 창시자 달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주의에서는 성경 역사를 무죄(innocence)시대, 양심(conscience)시대,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율법(Law)시대, 은혜(grace)시대,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등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양심시대는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따라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주셨다는 교리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 사건과 구원파라 할 수 있다. 이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다. 세대주의적 사고에 따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 사회학자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는 교파분열이 심하고, 사이비 이단종파가 많으며, 품위 없는 성직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물질주의로 나타나는 탐심과 성적 타락은 그 배후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세대주의 신학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달비는 유럽과 뉴질랜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세대주의를 보급하였고 많은 사람을 형제교회(Brethrenism)로 회심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1883~1897에 연례적으로 열렸던 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해 전파되었다. 많은 침례교인과 감리교인, 그리고 장로교인들이 그의 신학적 전제를 수용하였지만 기존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교단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정통교단을 떠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 당시 자유주의가 성경적 가르침을 거부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톤 칼빈주의자와 같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달비의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그의 종말론은 미국 근본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C.I. Scofield Reference Bible은 50년 동안 3백만 부가 팔렸는데, 그 영향으로 Biola, Moody, Dallas, Grace와 같은 신학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종말론을 가르쳤다.

달비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부인하였다. ⑴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된다는 ‘전가설’, 즉 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가진 죄를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는 교리이다. 신학자들은 이 교환을 전가(imputation)라고 부른다. ⑵성도의 성화과정에 필요한 십계명의 규범적 기능을 부인하였다.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부인하였다. 결국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사역하였다. 결국 십계명을 무시하는 도덕률폐기론, 즉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학의 극단적 열매가 구원파의 회개무용론, 도덕률폐기론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점진적 계시와 관련하여, 한 세대는 하나님의 경륜 안의 한 단계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기존교회 안에서도 특히 극단적 세대주의 신학(ultradispensationalism)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 이스라엘이 독립하던 해 1948년으로부터 한 세대되는 1988년 전후에 예수가 재림하고 신자들은 휴거된다고 가르치던 대형교회 목사들이 있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은 어떻게 다른가?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계시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해 인간이 시험받는 기간”이다. 세대주의는 구약은 율법시대, 신약은 은혜시대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세대의 수: 바울은 적어도 세 개의 세대를 언급한다. 현재 이전의 세대(골 1:25-26), 현 세대(엡 3:2), 그리고 장래 세대(엡 1:10). 이 세 세대는 네 번째 세대를 요구하는데, 율법 이전 세대다. 그리고 율법 이전 세대는 다시 두 개로 분류되는데,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로 구분된다. 성경의 전천년설적 이해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다섯 세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7세대는 노아홍수 이후의 한 세대와 아브라함의 부름을 계기로 한 또 한 세대를 상정하고 있다.

세대주의신학은 문자적 해석원리를 따른다. 이 해석원리를 적용하다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 날 시작된 것으로 본다.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도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지 율법의 도덕적 교훈, 즉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맹점이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외면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니, 유병언과 구원파 교인들의 삶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고 탐내고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새대주의의 우산 아래서 수 많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세대주의를 이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사기독교의 나쁜 신학이 틀림없다.

언약신학: 하나님은 행위언약에 실패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을 준비해 주셨다.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은 누구든지 자기의 노력이나, 자기의 선이나,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은혜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영생과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고 노아와 언약을 맺고 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이삭, 야곱과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고 점진적으로 그 뜻을 계시하셨는데, 모든 언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수 ‘자손’(seed)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수로 적혀 있는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영생의 복을 얻게 되리라는 은혜언약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구약시대에는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에는 실체를 보고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림자였고 예표였지만, 새언약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다는, 그림자를 폐한 언약이다(피영민, 2015).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은 다른 법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에는 연속성이 있다. 각 법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리고 두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개혁신학(Reformed Tradition)은 멜랑히톤, 루터, 칼빈과 쯔빙글리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법에는 도덕적이고, 의식적이며, 시민적 측면이 있는데, 도덕법에는 ①시민적, ②영적, ③규범적 3가지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언약신학은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나의 은혜 언약 아래 역사하신 것으로 본다. 통일된 특징은 은혜의 언약이며 그 언약 아래 있는 구원적 계획이 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구약의 언약은 기대적 성격이 있고, 신약에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취된 구원으로 그 언약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이단집단과의 논쟁을 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율법’(말씀)과 ‘성령’, 그리고 ‘나’ 사이에 세 가지 역학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⑴말씀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경우; ⑵말씀은 강조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무시되는 경우; 그리고 ⑶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경우이다. 첫째는 율법을 배격하고 성령의 직통계시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의 경우로 율법을 폐하고 마음대로 살려던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에는 성령 사역의 이름으로 다락방 운동(가계저주론, 조상 죄), 신사도운동(제3의 물결과 같은 현상적인 집회), 알파코스와 은사남용, G-12와 견고한 진, 쓴 뿌리, Soul Tie, 귀신론에 기초한 내적치유 운동이 행해지고 있으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둘째는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로서 율법주의 오류에 빠진 이들이다. 율법주의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율법주의자의 문제점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한 다음 자기 의(義) 사상에 빠지는 데 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씀을 따라 생활하려는 노력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배제되는 성향이 있다. 세 번째는 받은 바 이신득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매우 극적인 내용들 때문에 듣는 자들은 쉽게 거기에 빠져들어갔다. 예수의 재림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이단집단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뼈대를 둔 것은 그 매혹적인 극적인 정황 설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세대주의 사상은 한국교인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권호덕). 세대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무천년 왕국설이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3. 율법이란 무엇인가?
존 파인버그(John Feinberg)에 의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삶의 규칙(rule of life),”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계명들(commandments)이다. 율법은 넒은 의미로 성경전체,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 좁은 의미로 십계명을 가리킨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인 십계명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두 돌비에 새겨졌다. 첫 번째 돌비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나와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 나와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대신(對神)관계가 기록돼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대인(對人)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율법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참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지침서, 즉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에게 영속적 관계를 위해서 항상 율법을 주신다. 율법에는 제사법적(ceremonial) 차원과 시민법적(civil) 차원, 그리고 도덕법적(moral) 차원이 있다. 세 차원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는 주로 제사법(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을 다루고, 신명기는 도덕법을 기록하고 있다. 의식적인 제사법은 금식과 침례(세례), 할례, 유월절, 정결법, 십일조 등과 관계되는 것이고, 시민법은 소송문제, 안식일, 결혼, 노동과 같은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도덕법은 안식일을 제외한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나 언제든지 타당하게 적용되는 영구불변의 항존법(standing law)이다. 제사의식법은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신약시대라 해서 십계명이 폐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에 와서 도덕법은 더욱 굳게 세워지고 있다(마 5:19; 롬 3:31). 신약에서 율법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한 데 묶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하고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구원파는 성경과는 너무 거리가 먼, 매우 위험한 율법이해를 하고 있다. 율법을 너무나 좁게 이해하고 있다. 율법을 설명할 때, 성령과 인간 사이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성화를 위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가치가 있는가?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 교육시키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피영민, 2008).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따르면, 비신자는 율법을 순종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은혜에 의한 구원에 감사드릴 길을 마련해주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성령은 또한 율법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며 회개케 하신다. 모세의 율법의 규범적이고 일차적인 용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법의 근간이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을 계속 ‘증거판’(Testimony)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계시다. 따라서 이 뜻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진노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드러난 것이다. 다음의 ‘율법의 3가지 용도’는 멜랑히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이신칭의(이신득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의 3가지 용도: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첫째로 율법의 용도 가운데는 악을 제어하는 시민적 용도(civil function)가 있는데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10가지 계명 중 8가지가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십계명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재갈과 같다”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데 율법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율법에서 저주와 정죄 소리만 듣는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인간은 구원파에서는 율법의 죄를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기능만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신학적, 영적 용도(spiritual function)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용도로서,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예수를 찾도록 하는 몽학(蒙學)선생의 기능을 한다. 율법은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엄격한 교사(몽학선생)인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셋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세 번째 규범적 용도(normative function)가 있는데, 누구든지 중생하면 율법을 지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도록 기능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중생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죄인은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죄인이고 또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율법의 제3용도는 중생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중생한 후에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 성령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특별히 십계명을 판단의 잣대로 이용한다.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고 말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법“(롬 7:22, 25)이라고 부르고 있다.

4. 성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율법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하고 있다: “내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율법은 원래 구원받은 선민을 괴롭히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율법폐기론이나 불순종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삶이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받은 성도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히 12:1-3).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죄와 악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의 근원은 마귀이고 내 안에 있는 악은 바로 죄성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세력, 즉 밖에서 성도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과 안에서 거룩과 경건을 방해하고 성령의 소욕을 방해하는 죄성, 이 두 가지 세력과 싸우는 가운데 성화를 이뤄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기존교회에서 하는 것은 종교요, 자기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정통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바울은 사랑으로 율법의 구체적 계명을 준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엡 6:2).

권신찬은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 새벽기도, 기도생활까지도 율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규범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과거에 장로교 목사로서 이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 노력했던 것이 소용이 없었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제 자기를 괴롭혔던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면서 은혜를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자는 무서운 자기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하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겠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거역, 탐심, 살인 등의 죄를 무엇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성경에서 율법이 폐해졌다고 말씀할 때는 그 율법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율법과 법도 즉 모세의 율법은 십자가로 폐한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할례나 제사제도나 절기 등의 제사법이나 시민법에 관련된 율법이 폐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하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임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갈 3:11-13).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는 자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시내산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소개하신 후에, 즉 죄의 굴레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 이제 너에게 보여준 자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시편 19편에서는 율법의 완전함을 노래하며, 119편에 와서는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절)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의 일부분인 도덕적인 윤리규범은 신약에 와서 다시 강조된다. 도덕적 율법은 폐한 것이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계명)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말씀하신 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사단은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고 율법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경험해서 죄를 안 짓게 되길 원하신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정상이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면, 율법과 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윤동일, 2008).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노력이 율법의 반역을 초래하였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할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 7:12).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말했다(딤전 1:8).

5.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주신 시기는 출애굽 후, 즉 구원받은 후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지침서이다. 은혜가 감사해서 주를 위해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건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다.” 율법을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유도하는 종교는 하등종교, 사이비종교가 분명하다.

율법과 은혜.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쳐놓은 원인 중 하나다...하나님의 십계명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은혜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은혜 언약으로 가는 예표요, 단계다”(피영민, 2007).

성경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등 많은 언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약속은 단수로 되어 있고 언약은 복수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가르침(언약)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언약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가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삶의 원리이며 규칙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의 원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두고 십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완전한 계명을 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씻음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은혜가 공짜라고?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씨뿌림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다(마 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하 반응과 철저한 청산이 강조된다. 은혜는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투자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 속담은 성경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관계중심적인 체면사회에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거저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란 개념의 은혜는 없다. 선물은 자발적인 순환을 요구한다.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은혜의 조건은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고(엡 2:9), 다음 조건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투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이민규, 2014).

갈라디아서는 신실함과 순종의 삶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갈 5:2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에 대해서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것처럼 ‘완전성화’란 신자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거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죄에 끌려가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즐기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요 16:8).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율법에 작별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27).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그 결과로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행위다.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마틴 루터도,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설거지와 빨래하기,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5.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들: 예수님의 재림과 세대주의 종말론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흥분과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기본적 입장이 확고해졌다. 그 세 가지 입장은 각각 재림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그리고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천 년을 지금 천국에서 이뤄지는 죽은 성도들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

연대기적 해석을 하게 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개념으로 분리시켰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와 연관된 반면, 은혜는 그리스도와 믿음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은 결코 구원이나 칭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스코필드(Scofield)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 성향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환상적인 이상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나 지상천국을 약속한 이단종파에 미혹되어 현실의 삶을 망친 경우를 많이 목격하고 있다.

무천년설에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고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 수로 봐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천 년이란 교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년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기간을 천 년으로 보는 것이다. 천 년은 단지 택한 백성을 전부 구원할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피영민).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주제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에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게 되기가 쉽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③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 7-8); ④종교적 징조 “이단”이다(마 24: 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시기에 대해 성도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서적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그리심, 2003.
김민규.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새물결플러스, 2014.
스탠리 그렌츠. [누구나 쉽게 배우는 신학]. CUP, 2000.
피영민. [신약개론]. 검과흙손, 2015.
Walter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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